ARTIST

이 은 정

Lee Eun Jeong

이은정 작가는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인간의 감정과 기억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지워지고 흐려지는 장면 안에서도 섬세한 정서의 결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작업은 그 미세한 흔적을 되살리는 내밀한 의식이 된다. 작가는 불완전한 마음을 마주하고 정리하는 과정 속에서 우울과 불안이라는 오래된 감정과 조우해 왔으며, 이를 가장 온전히 다룰 수 있었던 매체는 ‘바느질’이었다. 자수는 감정을 손끝으로 옮기는 신체적 수행이자, 반복되는 움직임을 통해 혼란스러운 내면을 정화하는 심리적 과정이다.


작가는 일상의 미세한 파편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잊힌 감각을 다시 불러내는 창작의 흐름을 연금술적 여정에 비유한다. 니그레도(흑화)가 내면의 어둠을 직면하는 단계라면, 알베도(백화)는 서서히 회복이 일어나는 순간이며, 루베도(적화)는 감성과 자아가 조화롭게 정립되는 지점이다. 이 여정은 작가의 작업 속에서 정서적 구조로 자리한다.


오랜 시간 축적되는 자수의 리듬은 마음의 깊은 층위에서 하나씩 건져 올린 감정의 조각들이다. 자수와 회화는 물리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을 함께 품으며, 손끝의 느린 맥박을 따라 표면 위로 떠오른다. 작품에 등장하는 문, 동굴, 계단, 섬, 검은 구체, 달, 별, 식물, 생명의 분수 등의 상징은 작가의 정신적 여정을 시각화한 형태들이다. 어두운 동굴과 계단은 무의식의 심연을 향한 하강과 탐구를, 별과 식물은 회복과 재생을 나타낸다. 특히 ‘물’은 의식이 머물고 다시 흘러가기 시작하는 근원적 공간으로, 모든 것이 녹아들고 새롭게 변형되는 ‘영원한 물(aqua permanens)’의 성질을 품는다.


작가는 속도와 효율이 지배하는 시대에 실을 꿰는 행위를 느리고 정직한 수행으로 바라본다. 바늘과 실로 이어진 작업은 마음의 지층을 기록하는 조용한 연금술 지도이며, 반복 속에서 감정의 흐름은 차분히 정돈된다. 이러한 공간들 속에서 관객이 자신의 감정과 상실을 되짚고, 잃어버린 정서들을 다시 마주하는 시간을 갖게 되길 작가는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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